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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500

함흥차사의 유래

처음으로 고려의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 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그는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고 불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가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쨰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지만, 이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았다. 특히 이성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째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 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1398년에 일어난 이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이라고한다.

와병중에 일어난 이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방과(훗날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수 있겠다.

 

 

사실 이성계를 역사적으로 두고 본다면 고려말기의 장군으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빼앗았고, 홍적적10만 명이 고려에 쳐들어왔을때도 용감히 맞서 싸웠으며 그 후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원나라 장군 나하추와 지리산과 해주, 황산 등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과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업적을 이룬 왕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고려말기 신흥 사대부 계층을 대표한 장수이다. 어쩔수 없는 무인이라는 말이기도하다. 그는 자신이 무인 신분으로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고, 주위에 있는 신하들을 믿지 못하였다.

이는 자신이 공양왕과 공민왕을 피를 보며 폐하고 왕위에 오른 그의 성품?이라고 보인다.

또한 조선을 건국함에 있어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국교인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수적이고, 여성들이 피해아닌 피해를 보는 것과 중국에 대하여 사대사상을 취해왔기 때문에 수많은 전쟁과 사건에서 굴욕을 맞보게 되었기 때문에 이성계의 평가는 극과극으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