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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500

조카를 버린 수양대군과 변절자라 평가되고 있는 신숙주

단종

1452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하지만 원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죽자, 단종이 12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문종은 황보인,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세자의 보필을 유언으로 남긴다. 왕위에 야심을 품은 수양대군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을 당여로 삼고는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권람, 한명회 등과 함께 황보인, 김종서를 살해한다. 이사건을 계유정난 이라고 한다.


우선 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보필하라고 하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두그룹의 교집합이 보일것이다. 신숙주.

당시는 분경금지법이라고 해서 왕실인사들이 조정대신들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법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혹시 수양대군이 우연을 가장해서 신숙주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만난것은 아닐까?

수양대군은 어린조카 단종의 즉위를 중국 황제에게 알리기 위한 중국행을 감행했다. 이때, 신숙주를 같이 데리고 간것이다. 이에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서장관, 즉 비서관이 되어 명나라에 동행한다.

이들이 중국에 함께 머문기간은 약 5개월.

훗날 세조는 이때부터 신숙주와 뜻이 통했고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모든 권력을 장악하자 단종은 이름뿐인 왕으로 전락했다. 결국 단종은 한명회 등의 강요에 더 견디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된다. 

신숙주는 일등공에 오르며 다른대신들과 마찬가지로 동료라 칭하며 그의 공을 높이 평가 했다.


세조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신숙주.

그런데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폄하되어있다. 연려실기술에 보면 단종복위운동을 하는 사육신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데 바로 그날, 신숙주가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부인이


아니 대감, 이게 어찌된 일이오?

어찌하여 당신이 살아온단 말이오?

지난날 성승시(성삼문)와 대감이 얼나마 친하게 지내셨오?

어찌하여 당신이 살아온단 말이오?

부끄럽고 부끄럽소

당신이 살아온 것이 나는 부끄럽소!



위에 대사는 신숙주의 부인 윤씨가 사육신들이 죽임을 당하던 날에 남편이 살아 돌아오자 남편의 변절을 부끄러워 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특히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는 윤씨 부인이 목을 매서 죽었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실록에 의하면 사육신이 옥에 들어가기 6개월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모든 내용들은 후대에 윤색되거나 과장된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신숙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이게 된이유를 알아보자.


신숙주와 관련해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바로 사육신의 대표적인 매죽헌 성삼문이다. 성삼문은 신숙주보다 한살 적었으나 둘은 친구였다.

성삼문은 1447년 30세에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여 신숙주와 함께 집현전 학사로 활동한다. 세종때는 신숙주와 함께 중국의 음움학자 황찬을 찾는 등 한글 반포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정계초기부터 그들은 학문적 동지였다.

하지만 그 둘이 완전히 갈라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숙부 수양대군의 위세를 견디지 못한 당종이 왕위를 넘기기로 한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성삼문이 옥쇄를 수양대군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수양대군은 몇차례에 걸쳐 왕위를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그것 또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다.


그날 수양대군은 몇차례에 걸쳐 왕위를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단종은 자신이 어리고 나라일을 잘 몰라 수양대군에게 맡긴다며 옥쇄를 넘겼다.

성삼문은 한동안 옥쇄를 꼭잡고 넘기지 않았으나 결국 옥쇄를 넘긴 성삼문이 통곡을 하자 수양대군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처럼 수양대군 등극에 대해 입장차이를 보이던 두사람. 이들에게 돌이킬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단종복위운동이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이 상왕 단종의 복위를 계획한것이었다. 이들을 두고 사육신이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수양대군의 즉위는 명분도 없는 정변이었고, 세조를 폐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는 것은 정통성의 회복이었다.

계유정난까지만 해도 단종은 왕이었기 떄문에 그들은 일을 도모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종을 내리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올리는 것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통성을 다시 세우지 않을수 없었고 그것이 단종복위운동이다.


이들의 계획은 세조 암살이었다. 명나라 사신을 환송하는 연회에세 세조를 호위하기로 한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기로 한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차질을 빚는다. 한명회의 제안을 받아들인 병조판서 신숙주가 호위무사인 운검을 세우지 말자고 한것이다.

밀고자가 생긴것이다.

함꼐 단종복위를 꾀했던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송이 이계획을 세조에게 고변한것이다.

성삼문등 주모자는 능지처참에 처해졌고 연루자 70명이 처형당했다. 신지어 부인들이다 딸들까지 공신들이 다 나누었다.

이듬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이사건 이후 신숙주는 단종을 죽이자고 주장을한다.

여기서 신숙주에대한 폄하가 나타났다.

단종의 왕비 전순왕후에 관련된 야사에는 신숙죽가 공신으로서 노산군의 왕비를 받아 여종을 삼았다고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송씨는 양인으로 살면서 82까지 장수했다.

신숙주에 대한 이런 평가는 세조에게 선택되고 협력한 탓이었다.




이 선택때문에 신숙주는 역사적으로 엇갈린 평을 게 된다.


처세에 능한 변절자인가?

아나라의 기틀을 짜기 위해 고민했던 천재인가?

이 답은 그리 간단하지않은 문제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