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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500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룬 세종대왕 '고기'와 '안탁갑'의 사랑


조선의 3 왕이었던 태종(1400-1418)에게는 양녕, 효녕, 충녕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은 남달리 총명했으며 독서광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고경전] 물론 [제자백가] 모두 암송했다. 이런 그였기에 태종께서는 당시 황희정승등 몇몇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첫째와 둘째 아들을 제치고 충녕을 후왕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1418 22살의 충녕대군이 조선의 네번째 임금으로써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이 가장 먼저  일은 국방강화였다이종무 장군을 대마도로 보내 왜구들을 소탕제압하게 하고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는 결실을 보았다 1443 최윤덕 장군을 북방으로 보내 야인들을 정벌두만강 일대를 정비하여 6진을 설치케 하였다.

국가의 기강이 어느정도 확립되었을 때부터 세종은 인재양성 주력하였다.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바탕은 인재와 학문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국에 걸쳐 인재를 모으게 하였고 이렇게 모인 인재들을 양성할 '집현전' 세웠다. 집현전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만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도덕, 정치, 경제에 관한 것은 물론 천문, 지리, 의학, 점술등 다방면으로 많은 연구와 수집의 성과를보였다. 

자신이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세종은 해와 달의 움직임으로 시간과 날짜의 순서를정하는 역법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천문학과 수학 연구에도 중점을 두었다. 세종은 이를 위해 나라안의 훌륭한 기술자들을 불러들였고 당시  방면으로 유명한  하나가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세종의 과학연구에  힘이 되어 세종 15년인 1433년에 혼천의라는 천문시계를 제작하였고  뒤인 1434년에는 자동으로 시보를 알리는공공 알람시계의 원조격인 자격루 이천, 김조등과 함께 만들었다. 그로부터 3 뒤에 그는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앙부일구 보완하여 해시계 만들었다. 이외에도 장영실은 대량인쇄가 가능한 조선식 청동활자인 갑인자 완성했다. 1441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 개발되어전국에 배포, 홍수피해 예방용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세종은 농사법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들어있는 농사직설이란 책을 저작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유용하게 사용케 했다.    

세종은 특히 백성을 위한,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 고심하였다. 흉년에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때 돌려받는 환곡법 제정하셨고 공평하게 세금을 걷기위해 과세법을 새로 만들어서 부정축재 관리나 부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1423 세종은 물물거래의 편리를 위해 구리화폐인 조선통보 만들었다. ‚청옥법이라는 법전을 만들어 죄인들을 공평하게 판결케 했으며  정확한 판결을 위해 3번의 재판기회를 갖게 하였으며, 연약한 노인이나 어린이들은 가능한 면죄케 했고 감옥환경도 개선토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세종은 신문고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들어주었다.


조선의 백성들을 위하는 임금인 세종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일화가 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는데, 태종이 특별히 충녕(세종)을 모시는 하인들한테 충녕에겐 삼시 세끼 고기를 꼭 챙겨먹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충녕에게만 고기 먹는 것을 허락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상을 물리고 반찬을 다시 가져오라고 하며, 결국 고기반찬이 없는 밥상을 먹고 나서는 길에서 주저앉아 기운이 없어서 못 움직인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또한 예술 깊은 관심을 보여 음악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때까지는 거의 모든 조선의 음악이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에 유감을 표하고 우리 정서에 맞는 악기와 노래를 만들게 하였다. 장영실과 더불러 혼천의 만든사람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3 악성이라 불리는 당시 유명한 박연은 그나마도있었던 우리 고유음악인 아악,  궁중음악 개량하였다. 그는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악기들을 참고,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와 음률에 맞는 65가지 악기를제작하였으며   가장 걸작은 편경이라는 악기이다. 박연이 정리해 놓은 아악은 오늘날 서양고전음악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중에 가장 빛나는 업적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지구상에는 4,000가지 이상의 언어가 있고 40여개의 글자가 있다.  중에서도 한글은 세계 어느 나라의 글자보다 과학적이다. 중국의 한자와 일본의 가나를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하나의 소리로 표기되는 음소문자이다. 중에서도 한글은 영어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음소문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한글로는 표현할  없는 것이 없으며 알파벳의 언어들처럼 몸짓으로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표현된다.


또하나의 이 이야기는 민간 어원설화이다.


세종이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바로 경상북도 청송에 살고 있던 여염집 규수 안탁갑 .

결국 안탁갑은 세종의 빈이 되었는데 안탁갑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빼어난 외모등 안탁갑에 매력에 빠진 세종이 정치에 뜻을 두기보다 안탁갑과의 애정에 빠져 있어 정사를 소홀하게 된다.  이에 임금을 걱정한 신하들이 안탁갑을 궁궐 밖으로 쫓아 냈고 이후, 세종은 안탁갑에 대한 그리움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병이났다.

하루는 세종이 행궁을 하게 되었는데 행차 소식을 알게 된 안탁갑은 행차 길에 달려나와 미음 한사발을 올렸고, 세종은 이것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고 한다.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 애절한 마음에 두사람은 몹시 괴로워하였고,

그 비통한 마음에서 비롯해 사람들은 몹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세종과 안탁갑의 사이 같다'라는 말로 '안탁갑 같다.'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표준어는 안타깝다.>

 


어원 설화는 설화의 특징상 사실유무를 판단하기보다는 설화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6명(영빈 강씨,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숙원 이씨, 상침 송씨)의 빈을 들이지만 아쉽게도 사료에서는 안씨 빈은 찾을 수 없다. 

 

 빈으로써 끝까지 살지 못하고 대신들에 의해 쫓겨나서 사료상에 없는 것인지, 설화이기에 사실이 아닌 것인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안타깝다는 말의 어원이 역대 최고의 왕이라 꼽힐 만한 세종대왕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은 참 흥미롭다.



또한 1445년에 우리의 한글로 [용비어천가] 펴냈다.  책은 한글로  가장오래된 책으로서 태조 이성계의 업적과 세종이전의 역대 조선왕들을 기리는 내용이 실렸다. 권제, 정인지, 안지등이  책의 공동저자들이다. 1449년에는 석가모니의 덕을 칭송하는 [월인천강지곡] 출판되었다.  고서의 출간은 불교에심취했던 세종에게는 더없는 기쁨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세종 31년에 세종대왕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450 2 17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