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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500

짧은 치세, 동생을 두려워한 정종

정종

  (1357~1419년, 재위기간 : 1398년 9월 ~ 1400년 11월, 2년 2개월)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정종(영안군)은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 되었을 떄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업적은 모두 정안군(이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있느냐?"고 반문하여 세자되기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방원의 강권으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후에 태조가 물러나면서 불안한 왕위에 올랐다. 방원은 일차적으로 도덕성과 대의를 살리고 자신은 다음차례를 기다린것이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이어서 어떻게 해볼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형식적인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했지만 조정의 모든 권력이 방원의 손의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원의 눈치를 보면서 허수아비처럼 행동할 뿐이었다.


  1399년 한양의 지형에 문제가 있다 하여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겨갔으며,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을 제정, 관인(官人)이 왕족과 외척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 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해에 왕족 및 권력가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삼군부에 직을 두고 있는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해 정무와 군정을 분리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모두 이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루어졌다(이방원은 세제로 책봉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방원이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세자에 책봉되길 원했던 것이다).

 

  1399년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했으며,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고, 이듬해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의 변속을 관리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이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은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이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사에는 정종에게 왕좌를 이방원에게 내주라고 권고한 사람은 정안왕후 김씨라고 한다. 김씨는 정종이 왕위를 더 오래 유지하고 있다가는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권고했고, 정종 역시 그녀의 생각과 같았기에 권고뱓은 바로 다음 날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정종과 정안왕후는 잠자리에서조차 죽음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동생 이방원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실권 없는 왕과 왕후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그는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년)에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의 능은 후릉으로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에 있으며, 정안왕후 김씨와 함께 묻혀 있다. 정종의 묘호가 숙종 대에 와서 정해진 것과, 능이 일반 왕족들이 묻히는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점으로 미뤄볼 때 그는 조선 중기까지 왕으로 대우를 받지 못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