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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500

시조 '하여가'와 '단심가'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의 문신을 거쳐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왕자의 난을 거쳐 조선의 제3대 왕이 된 인물이며,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이다.

 

성은 이(李),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과거 급제를 하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한다.
특히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려는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하였다. 



여기서 태종의 노력을 알수 있는데 학창시절 한번쯤 들어봤을 시조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고려왕조가 응급실의 중환자처럼 마지막 숨결을 허덕이고 있을때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조준과 정도전, 그리고 이들을 배척하려는 정몽주.

명에 갔던 태자가 귀국하자 황주로 마중나간 이성계는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그만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는다.

이사실을 알고 정몽주는 크게 기뻐하여 이성계의 세력인 조준과 정도전 일파를 탄핵시키려 계획한다. 하지만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이방원이 정몽주 일파를 없애려는 음모를 꾸미고 이를 알게된 정몽주는 이성계를 문병하는 척 하며 그 정세를 살피려 제발로 이방원의 사저를 방문하게 된다.

비록 정몽주를 살해하려 하나 이방원은 그의 뛰어난 능력이 안타까워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그의 뜻을 확인할겸 술과 음식을 대법하며 노래한수를 지어보일테니 화답을 부탁한다 하였다.  정몽주에게 절개를 굽힐것을 은근히 전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정몽주가 노래로서 화답하니 바로 '단심가'이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이 노래를 들은 이방원은 그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심복 조영규를 시켜 선지교를 지나는 정몽주를 죽였다.

그가 죽은 루 선지교에는 대나무가 생겨났는데 그 후로 선지교라는 이름을 선죽이라 고쳤고 그 다리위에 정몽주가 흘린 피의 흔적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사병 혁파로 병권 일원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 재정비, 척불숭유 정책으로 사찰 정리,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겼고 창덕궁, 덕수궁, 경회루, 청계천을 조성하였다.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하여,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 이거이 부자, 이숙번을 유배시키고, 아내인 원경왕후를 폐위 후 왕비 민씨의 외척들을 유배시키거나 교살시켜 어떠한 정치적 개입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이 왕이된 후에는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도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숙청한다.

 

태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과 기생을 좋아하여 폐위되고,
둘째 아들 효령대군은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될 것을 알고는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양녕대군을 폐위하는데 반대하는 신하들은 외지로 유배되었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아 후에 세종대왕이 된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22년 태종은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세종, 양녕, 효령 등 아들과 후궁과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태종의 능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이다. 원경왕후의 능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