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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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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를 버린 수양대군과 변절자라 평가되고 있는 신숙주 단종 1452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하지만 원래 병약하여 재위 2년만에 죽자, 단종이 12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문종은 황보인, 김종서 그리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세자의 보필을 유언으로 남긴다. 왕위에 야심을 품은 수양대군은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을 당여로 삼고는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이 권람, 한명회 등과 함께 황보인, 김종서를 살해한다. 이사건을 계유정난 이라고 한다. 우선 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세자를 보필하라고 하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두그룹의 교집합이 보일것이다. 신숙주. 당시는 분경금지법이라고 해서 왕실인사들이 조정대신들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법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혹시 수양대군이 우연을 가장해서 신숙주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만난것은 ..
안타까운 죽음, 조선의 5대 왕 문종. 문종, 그는 애통하게 죽은 인물이다. 그는 세종대왕시절에 여러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겼으며 기술분야에도 매우뛰어났던 군주이다. 물론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났으나 애석하게도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 대한 자료들이 부족한 현실이다. 문종(1414~1452)은 세종대왕의 아들로 조선의 5대 임금이다. 그는 조선의 역사장 가장 위대한 군주였던 세종대왕의 장남으로서 일찍이 세종대왕의 문학적 기질을 비롯해 문화적인 기질을 아주 잘 물려받아 문종도 소양을 비롯한 여러 과학기술에서 엄청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문종이 커가면 커갈수록 세종의 근심이 커져만 갔다. 문종이 몸이 약하니 왕위에 올라도 왕위를 보존하기 힘들것이라 판단했기에 고민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왕위까지 ..
조선의 태평성대를 이룬 세종대왕 '고기'와 '안탁갑'의 사랑 조선의 제3대 왕이었던 태종(1400-1418)에게는 양녕, 효녕, 충녕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은 남달리 총명했으며 독서광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고경전]은 물론 [제자백가]를 모두 암송했다. 이런 그였기에 태종께서는 당시 황희정승등 몇몇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첫째와 둘째 아들을 제치고 충녕을 후왕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1418년 22살의 충녕대군이 조선의 네번째 임금으로써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방강화였다. 이종무 장군을 대마도로 보내 왜구들을 소탕, 제압하게 하고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는 결실을 보았다. 또 1443년 최윤덕 장군을 북방으로 보내 야인들을 정벌, 두만강 일대를 정비하여 6진을 ..
시조 '하여가'와 '단심가'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의 문신을 거쳐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왕자의 난을 거쳐 조선의 제3대 왕이 된 인물이며,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이다. 성은 이(李),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과거 급제를 하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한다. 특히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려는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하였다. 여기서 태종의 노력을 알수 있는데 학창시절 한번쯤 들어봤을 시조 '..
짧은 치세, 동생을 두려워한 정종 정종 (1357~1419년, 재위기간 : 1398년 9월 ~ 1400년 11월, 2년 2개월)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정종(영안군)은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 되었을 떄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업적은 모두 정안군(이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있느냐?"고 반문하여 세자되기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방원의 강권으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후에 태조가 물러나면서 불안한 왕위에 올랐다. 방원은 일차적으로 도덕성과 대의를 살리고 자신은 다음차례를 ..
함흥차사의 유래 처음으로 고려의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 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그는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고 불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가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쨰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지만, 이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았다. 특히 이성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째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